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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12.19 십자군에 대한 4가지의 잘못 알려진 사실들

예전에 작성한 글입니다. 다시 올리네요.


십자군에 대한 4가지의 잘못 알려진 사실들

(Four Myths about the Crusades)


7차와 8차 십자군을 이끈 프랑스의 국왕 루이 9세 (원문에서 인용)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중세사를 가르치고 있는 폴 크로포드(Paul F. Crawford)라는 분이 십자군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저술을 남겼기에 여기에 간략히 소개한다. 이 사람의 의견 모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십자군의 역사가 개인적으로 참신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크로포드는 현대 우리가 알고 있는 십자군에 대한 평가가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고 전제한다. 서방의 종교를 앞세운 탐욕스럽고 무차별적인 침략에 의해 평화롭고 문화적이던 이슬람 세계가 큰 피해를 입었고 그로 인해 이슬람 세계는 서방에 대한 혐오, 증오심에 물들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지하드라는 대서방 테러의 주요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 모두가 알고 있는 십자군 운동과 그 결과라고 말한다. 2001년 클린턴 전대통령은 연설에서 “십자군이 피가 무릎에 찰 정도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슬람교도를 학살하였는데, 이 사실은 중동에서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있으며, 서방은 현재까지도 그 학살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라고 말을 했는데, 이는 서방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십자군에 대한 견해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라고 크로포드는 전한다.

 

하지만 십자군에 대한 일부 사실이 아닌 사항과 후세의 왜곡된 결과들이 이런 견해를 유발하고 부추기고 있는 것일 뿐, 역사의 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크로포드의 주장이다. 그가 주장하는 십자군에 대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4가지 사항이 이제 소개된다.

 

 

1. 십자군은 이슬람 세계에 대한 이유 없는 도발이다?

크로포드의 주장은 이렇다. '이슬람교가 생기기 이전에 지중해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들의 세상이었는데, 이슬람교도들이 침입을 해서 여러 지방을 기독교인들로부터 빼앗았다. 스페인, 시칠리아 및 남부 이탈리아, 이집트, 중동 그리고 소아시아까지 이슬람이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그 와중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해 당하거나 차별 대우를 받게 되었다. 소아시아 전역과 콘스탄티노플까지도 이슬람 세력이 위협하게 되자 동로마제국은 서유럽에 원조를 요청하였고, 이에 대한 응답이 이슬람권을 향한 기독교권 최초의 반격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군이었다.'

 

다소 혁신적이긴 하지만, 동일 종교권으로 묶어서 역사를 재조명한다면 매우 타당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는 5개의 성지가 있었는데, 예루살렘,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를 이미 이슬람 세력에 넘겨주었고, 남은 것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뿐이었다. 십자군이 시작될 시기에는 콘스탄티노플 마저 위협을 당하고 있었으니, 기독교권의 입장에서는 참을 만큼 참아왔던 분노를 터트릴 만한 시기였다. 당시 유럽 기독교 세력은 스페인의 레콘키스타 운동과 노르만의 시칠리아 정복으로 이슬람의 침입을 간신히 막아내는  정도였으나, 십자군을 통해서 처음으로 적극적인 반격에 나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보면 십자군 운동은 이유가 매우 충분한 영토 수복 전쟁이 된다. 

 

2. 십자군 지도자들의 참여 동기는 부의 축적이다?

당시 지도자들이 십자군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부유한 동방을 약탈해서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실이 아니라고 크로포드는 말한다. 십자군 원정에는 많은 돈이 들었다.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를 팔거나 저당을 잡혀서 군대 운영비를 충당했으며, 점령 후에도 서유럽의 많은 자금이 십자군 왕국의 유지비로 지원되었다. 4차 십자군도 중동으로 갈 뱃삯이 모자라서 동로마제국을 침략하게 된 것이었고, 7차 십자군을 이끈 루이 9세는 연간 왕실 수입의 6배 이상을 원정비로 지출했다. 교황은 첫수입세와 면죄부까지 도입해서 십자군을 지원했는데, 병원기사단 단장 Villaret의 풀크는 교황에게 "십자군 운동이 아니라면 교황이 직접 나서도 이 정도의 금액을 축적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썼다. 13세기에 이르면 지원자도 모집하기 힘들어졌으며, 왕이나 교황이 십자군 원정을 주창하면 인기 마저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래서 후기 십자군에 갈수록 지원자와 자금의 부족으로 원정 규모가 점점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십자군에 참여한 영주와 왕들이 일부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신앙심 또는 지도자로서의 의무감으로 십자가를 짊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객관적으로도 이들 기득권자들이 확실치도 않은 수입을 위해 모험을 걸었을 리가 없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들 대부분은 성지에서 일정 기간 의무를 수행한 후 군대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그렇기 때문에 중동의 프랑크 왕국은 존재 기간 내내 숙명적인 인력 난에 시달려야 했다.

 

3. 십자군은 신앙적으로 성실치 않았고 세속적인 이유를 따랐다?

십자군에 자원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성실하지 못했고 물질적인 동기로 이끌렸기 때문에 1차 십자군부터 종교적인 의미가 퇴색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하지만, 크로포드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이는 십자군의 높은 희생자 비율에서도 나타난다. 한 군사학자는 십자군의 사상자 비율이 75%에 이를 정도로 끔찍했다고 적었다. 13세기 십자군에 참여한 로베르 크레세크는 “성지에서 신을 위해 죽으려고 바다를 건너왔다.”라고 적은 후 얼마 후에 압도적인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러한 자세가 당시 십자군의 일반적인 마음가짐이었다고 크로포드는 말한다. 당시 십자군 모집을 위한 설교에는 기득권의 상실, 고난과 죽음이 있을 수 있다는 경고가 수없이 주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원자가 끊이지 않았던 이유는 십자군이 속죄 또는 면죄의 방편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의 우리 상식으로 그들안에서의 종교의 위치를 규정하면 그들의 이런 면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이 가진 신앙의 의미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십자군의 동기를 우리가 상식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물질적인 면으로 치부해 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의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최소한 우리가 아는 보에몽, 보두앵 그리고 탕그레드 등이 자신만의 영지를 확보하기 위한 정복 전쟁을 위해 참여한 것으로 보이며, 일반 병사들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독교인 마을까지 약탈했고, 죽은 이슬람인의 배를 갈라 금화를 찾을 정도로 물질적인 면을 추구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예루살렘 왕국에 새로 도착하는 병사들일수록 호전적인 면을 보인 것도 그들이 출발하기 전에 가졌던 물질적인 동기에 의하지 않고서는 모두 설명하기 어렵다.

 

그들의 신앙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이 가진 전쟁과 죽음에 대한 인식도 우리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수없이 많은 전쟁을 하다가 기독교인들 간의 전투가 중지되자 주저 없이 이교도에게 칼을 돌린 그들이 탐욕 이외에 자신의 죽음 등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실제로 그들이 죽음에 대해 무감각하거나 두려움이 적었다면 이러한 면도 오늘날의 우리가 이해하기 불가능한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세속적인 것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은 종교기사단에도 지원자가 넘쳐 흘렀다고 하니 십자군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는 좀 더 종교적으로 충실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4. 십자군 때문에 이슬람 세계에서는 증오가 일어나고 기독교권을 공격하게 되었다?

전술한데로 이슬람 세계는 십자군이 일어나기 450년 전부터 기독교권을 공격해왔다. 근대까지도 무슬림들은 십자군을 그저 그들이 물리쳤던 서방인의 작은 도발로만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오랜 전쟁 역사 중에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적었던 편지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후에 이라크의 왕 파이살1세가 되는 파이살 알하시미(Faisal Al-Hashemi)는 프랑스인으로부터 십자군 이야기를 듣자 “얘기 중에 미안합니다만, 십자군 전쟁에서 누가 이겼죠?”라고 물었다고 한다. 1차 세계 대전 시기까지도 이슬람인들은 이 작은 사건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으며, 아랍어로 된 십자군 관련 자료 대부분도 무슬림이 아닌 아랍권의 기독교인들이 남긴 것이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당시에 이슬람권에서는 예루살렘 자체의 중요성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십자군을 상대한 이슬람의 영웅들 중에는 장기와 바이바르스가 언급되었을 뿐 살라딘은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러했던 이슬람의 십자군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된 것은 서방의 영향이라고 크로포드는 말한다. 볼테르, 기번, 월터 스코트 그리고 런시만으로 이어지는 사학자 또는 작가들이 "탐욕스럽고 호전적인 야만인이던 십자군이 부의 축적을 위해 문화적이고 평화를 사랑하는 이슬람 세계를 침범했다"고 적었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또 십자군을 자신들이 따라야 할 선례로서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식민지 수탈을 합리화하는데 사용했다. 이러한 내용들은 이슬람권의 서구식 학교에서 교육 되었으며, 당시 민족주의가 발흥하던 이슬람권에서는 십자군이 이슬람인의 단결을 위한 좋은 도구로써 이용되었다는 것이 크로포드의 의견이다. 이로 인한 결과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이슬람의 대서방 피해 의식이며, 결국은 테러까지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이 내용은 다른 자료들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뭐라 덧붙일 수는 없다. 하지만, 내용 자체는 충분한 공감이 가능하며, 처음 접한 사람에게도 강력한 설득력을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는 아랍 세계의 서방에 대한 증오와 테러를 십자군이 아니라 근대의 서방 세계가 유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클린턴의 연설에서 언급된 예루살렘의 학살은 연대기 작가 아이귈레이의 레몽이 쓴 저서를 참고한 것이다. 당시의 다른 연대기를 기록한 푸세도 솔로몬 신전에서 피가 발목까지 찰 정도로 학살이 벌어졌다고 적었다.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은 이러한 기록들이 당시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피가 무릎 또는 발목까지 차는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비유까지 들면서 스스로를 욕 보이는 과장된 참상을 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십자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 또 신앙에 대한 충실성 그리고 예루살렘 점령의 어려움을 충분히 드러내기 위해서 이렇게 기록한 것이 확실하다. 실제로 이미 항복한 주민들을 학살한 경우에는 해당 지휘관이 병사들을 엄격히 꾸짖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이는 명백한 명령 불복종이고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 적들을 상대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참상은 과장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그에 따라 그들의 잔인성도 다소 완화 시켜 생각해야 한다. (알려진 것 보다는 덜 잔인했다고 해서 희생 자체가 적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아랍인을 동일한 인격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신앙에 의해 학살에 대한 죄의식도 없었다. 유럽에서조차 전쟁 후에 약탈, 겁탈과 살인은 빠진 경우가 거의 없었으니, 중동에서의 십자군에 의한 만행은 그보다 더욱 잔혹했음이 틀림없다.)

 

모든 역사들이 그렇듯 십자군의 역사도 많은 부분에서 왜곡되어 전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학자 또는 작가들이 왜곡을 하고 또 그것을 진실이라 믿는 우리들은 편견에 빠지게 된다. 클린턴의 연설처럼 깊은 이해 없는 인용은 오히려 이슬람과 서방의 반목을 부채질하고 이후의 더한 폭력 사태를 유발할 수도 있다. 또한 서방의 아랍권에 대한 이권 침탈도 더 이상 십자군의 이름을 빌려서 행해져서는 안될 것이다. 크로포드는 반목과 적대감을 조장하는  이러한 역사의 왜곡은 어떠한 경우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진정한 십자군의 이해를 위해 역사를 바로 잡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결론 짓고 있다.

Posted by Spalmi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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