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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5.02 시오노 나나미가 전해주는 "십자군 이야기"

예전에 제가 가지고 있던 웹사이트에 올렸던 내용인데, 그냥 지우기는 아까워서 이곳에 다시 올립니다.



“로마인 이야기”로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높은 시오노 나나미가 이번에는 십자군의 역사를 들고 나왔다. 그녀는 자칫 혼란스러울 수도 있는 그 200년간의 역사를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시원스럽고 명쾌하게 결론지으며 독자들이 거부할 수 없는 호소력을 가진 장대한 드라마로 재탄생시켰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다소 인기가 없는 분야인 십자군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다는 자체만으로도 이번 시오노의 새로운 저작을 높게 평가할 수 있으나, 예전부터 지적되어 왔던 사서 집필가로서의 단점들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어졌고, 오히려 우려가 될 만큼 심화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녀는 역사를 너무나도 단순화 하려는 경향이 있다. 많은 참고 문헌들이 여러 복잡한 요인들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녀의 결론은 의심스러울 만큼 명쾌하다. 또한 자신만의 추론으로 역사적 사건의 인과를 강요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쉬운 안내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정작 그녀가 일러준 길의 정당성은 별개의 문제다. 또한 그녀는 객관적이지 않다. 특정 국가 또는 인물의 미화를 위해서 자료들의 취사 선택을 전혀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전부터 지적되어 왔듯이 그녀의 작품이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일본 우익의 믿음과 그 방향을 계속 같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이번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는 이전에 접할 수 있었던 관련 서적들과 많은 면에서 두드러지는 독특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제 그 중에서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일부분만을 간추리고자 한다.

 

  1. 1.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예루살렘이 언급되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우르바누스 2세가 예루살렘 또는 성지 회복이란 말을 사용한 기록은 없다고 단언한다. 교황이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당시 모든 사람들의 공감대가 그렇게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방을 도우라”는 말은 당연히 성지 회복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라는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이는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의 요청과 당시의 정서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립되었으며 교권과 교구의 확대를 노린 교황청의 계획은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사실일 수도 있다. 유일한 동 시대의 기록을 남긴 샤르트르의 푸세(Fulcher of Chartres)에 의하면 교황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푸세가 공의회에 참석했는지 조차도 확실하지 않으며, 20년 뒤에 기록을 남긴 다른 연대기 작가들 (수도사 로베르, 돌의 대주교 보드리, 그리고 노쟁 수도원장 기베르)은 우르바누스 2세가 성지 탈환을 요청했다고 적고 있다. 시오노가 칭찬해 마지 않는 런시만(S. Runciman) 조차 푸세를 포함한 네 개의 기록들이 서로 너무 달라서 어느 것이 사실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여전히 옳을 수는 있다. 순진하게 동로마 제국을 지원하고자 했던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의 열풍이 생각보다 엄청난 것을 보고난 후에 정치적인 이유로 성지 회복의 기치를 내걸었을 수도 있고, 연대기 작가들은 십자군의 목표가 성지 회복으로 옮겨 가고 또 그 목표를 달성한 이후에 기록을 남겼으므로 공의회의 연설에 당연히 그 내용을 추가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다. 사학자들이 불확실한 사실에 대해 자료를 열거하거나 상식적인 추론을 더할 수는 있다. 하지만 불일치하는 자료는 무시하고 선호하는 내용만을 근거하여 단언하는 것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긴 시오노 나나미는 소설가다) 

 

  1. 2. 인육 사건의 진실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십자군은 이후 엄청난 기아에 시달린다. 어디서도 충분한 식량을 구할 수 없었던 그들은 결국 마라트 알 누만이라는 근처 마을에서 인간의 육신을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는 푸세와 다른 연대기 작가 캉의 Radulph도 기록을 남겼고, 영주 중의 한 사람이 교황에게 보내는 서한에도 남겨져 있으므로 충분히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마라트 알 누만 공성전에서 레몽과 보에몽이 공격에 실패한 후에, 레몽은 다른 마을을 공격하러 떠났고 보에몽이 단독으로 협상에 나섰다고 적고 있다. 보에몽에 의해 평화적인 항복 협상이 거의 완료되었으나 2주 후에 돌아온 레몽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마을을 공격하여 1만명의 주민을 모조리 학살한 것으로 묘사했으며, 이후에는 인육 사건까지 일으켜서 레몽은 다른 영주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고 다소 감정적으로 기록했다. 보에몽의 영웅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레몽을 지나치게 비하하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오직 그녀의 책에서만 볼 수 있는다는 점이다. 런시만에 의하면 마라트 알 누만에서 레몽과 보에몽 그리고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의 군대가 2주 동안 공성전을 벌이던 중에, 레몽의 군대가 공성탑을 이용하여 성벽을 돌파했고 아랍 주민들 일부가 성 내부의 탑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이때 레몽의 전과를 시기한 보에몽이 협의도 없이 단독으로 항복 협상에 나섰고 그를 믿고 항복한 주민들은 탑 밖으로 나왔다. 당연히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한 레몽의 군대는 전투를 벌이며 주민들을 학살했는데, 항복한 주민들도 이 학살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점령에 성공한 영주들이 회의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배고픔에 허덕이던 병사들이 아랍인의 시체를 먹은 인육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푸세는 점령 전에 인육을 먹었다고 적었다.

 

반면 시오노 나나미의 서술에는 상식적인 의심마저 든다. 초기 공격을 모두 막아낸 수비병들이 특별한 이유 없이 보에몽에게 항복하고자 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없고, 수 일에 걸쳐 공성탑을 만든 레몽이 이미 2주전부터 협상이 진행 중인 것을 모르고 공격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믿기 어렵다. 레몽 측의 연대기 작가 아이귈레이의 레몽(Raymond of Aguilers)은 보에몽이 공성전에서는 한 일이 별로 없음에도 많은 수의 탑을 확보하는 마술을 보였다고 기록했다. 이런 이유로 레몽의 군대에 의해 마을 외벽이 뚫리는 위기에 처하자 주민들이 보에몽에게 항복하고 탑을 넘겼다는 이야기가 훨씬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아랍의 작가 이븐 알 아시르의 기록도 이와 유사하며, 시오노의 이야기와는 차이를 보인다.

 

인육 사건이 레몽의 군대에서 벌어졌다는 기록은 푸세의 글에서도 찾을 수 없다. 물론 마라트 알 누만 공략에 레몽, 로베르 그리고 보에몽이 참전했고, 함락 직후 보에몽은 떠났으므로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은 사실이다. 다른 기록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건을 레몽의 책임으로 돌리는 글을 본 기억은 전혀 없고, 그것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는 내용도 없었다. 레몽의 연대기에는 그 사건으로 인해 십자군들도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고만 적었으며, 당시 처한 상황이 누구를 비난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을 정도로 열악했다는 기록을 고려하면 레몽의 위상이 그 사건으로 인해 손상을 입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레몽이 서둘러서 예루살렘으로 떠난 이유는 당시 총대장격이던 레몽에게 원정을 속행하라는 제후와 부하들의 강력한 요구가 집중되어서였다. 절대로 인육 사건의 충격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유일의 십자군 관련 저작을 남긴 김태권은 보에몽의 사악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가 인육 사건을 주도했다고 그렸다. 그런데 시오노는 보에몽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  레몽측이 주도했다고 한다. 양쪽 다 진실을 알릴 생각은 없어 보인다. (김태권의 보에몽 주도설은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의 쇠망"을 인용한 것이나, 그 책의 주석에 나열된 참고 문헌을 고려하면 근거가 없다)

 

 

3. 보에몽과 탕그레드는 이탈리아인?


시오노 나나미는 인육 사건에서 보듯이 보에몽에 대해서 대단히 우호적이다. 탕그레드의 경우에는 한 술 더 떠서 거의 독보적인 영웅으로 치장해 버렸다. 물론 둘 다 능력이 출중한 지휘관임은 분명하고 이를 부정하는 자료는 없다. 하지만 이들이 십자군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시오노 나나미는 그들이 그녀가 사랑하는 이탈리아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영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보에몽은 이탈리아에 온 노르만 이민 2세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 로베르 기스카르가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살다가 시칠리아에 자리를 잡아 공국을 건설했고, 보에몽은 그의 맏아들이었다. 그랬으니 보에몽은 물론 그의 조카 탕그레드도 불어만으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을 시오노만이 보에몬드와 탄그레디라는 이탈리아식 이름으로 줄곧 부르며 글을 적고 있다. 하지만 이를 불편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정복왕 윌리암이나 영어라고는 평생 한마디도 안했을 리처드 사자심왕을 불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기욤이나 리샤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말이다.

 

탕그레드가 초기 예루살렘 왕국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모든 원정에 참여했으며, 독자적으로도 적은 병력으로 갈릴리를 확보한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시오노는 이 사실들을 매우 상세히 미화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주군이라고 할 수 있는 성묘 수호자 고드푸르아와의 관계도 상호 신뢰감이 돈독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다른 자료들에서는 볼 수 없는 점이기 때문에 이채롭기까지 하다.

 

사실 탕그레드는 야심이 대단한 자로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영지를 만드는데에 집중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삼촌인 보에몽을 따랐다. 이랬으니 성묘의 수호자가 된 고드푸르아와의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탕그레드는 갈릴리를 확보한 후 고드푸르아가 아닌 교황 특사 다임베르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다임베르트는 고드푸르아를 거의 죽음으로 내몰 정도로 괴롭힌 또 한 명의 야심가였다. 런시만에 따르면 고드푸르아가 죽었을 때, 탕그레드는 다임베르트와 아크레를 공략하려는 중이었다. 성묘 수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탕그레드는 힘든 아크레 공략을 잠시 미루는 대신 하이파를 공격하자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이파를 점령했고, 이후에는 차기 지도자로 보에몽을 세우기 위해 계략을 세우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은 실패했고 왕위는 고드푸르아의 동생인 보두앵에게로 돌아갔는데, 원래부터 보두앵과 사이가 나빴던 탕그레드는 왕이 된 보두앵을 만나지도 않았다고 한다. 

 

시오노 나나미의 탕그레드는 사뭇 다르다. 고드푸르아의 명령을 잘 따랐고, 그가 죽었을 때에는 원정을 중단하고 달려와서 예장 갑옷을 입고 장례식에도 참석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임베르트와의 관계는 물론 정권 찬탈 계획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보에몽을 부각시키기 위해 레몽을 졸렬한 사람으로 만들고 탕그레드를 최고의 영웅으로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베네치아, 피사 그리고 제노바 함대의 역할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한 이유와 거의 같을 것이다.

 

 

4. 또 다른 영웅 리차드왕


예루살렘의 왕 풀크나 아모리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없는 반면 리차드왕에 이르면 이야기는 다시 늘어진다. 그리고 여지 없이 이번에도 희생양이 등장하는데 프랑스의 왕 필립2세와 콘라트가 그 역할을 맡는다. 리차드왕에 대한 평가는 거의 모든 자료에서 좋지 않다. 예외로 들 수 있는 책은 시오노 나나미 이전에 가장 읽을 필요가 없다고 평가되던 토마스 매든의 저작과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뿐이다. 그런데 시오노는 모든 면에서 한 술 더 뜬다. 리처드왕의 모든 충동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의도된 것이라며 칭찬하고 있다.

 

아크레에서 있었던 2천7백명이나 되는 이슬람인 포로의 목을 벤 사건도 자신의 추론까지 더하면서 합리화시키고 있다. 여자와 어린 아이들을 포함한 그 많은 수의 포로들을 충동적으로 처형한 사실은 당시의 프랑크인에게도 충격이었는데, 왜 800년 뒤의 일본인이 이해를 구하고 있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그녀는 살라딘이 단지 리차드를 아크레에 묶어두기 위해 몸값의 지불을 자꾸 미뤘기 때문이라고 오히려 살라딘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진실이야 알 수 없겠지만, 다른 자료들에서는 포로를 풀어주는 보상으로 리차드가 석방을 요구한 프랑크인 포로 -이슬람 세계에 잡혀있던- 들을 모두 찾아오는 것이 시간 내에 어려웠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살라딘은 다른 이슬람 인질과 몸값을 받고 포로들을 석방하던가 아니면 몸값 만을 먼저 받은 후에 프랑크인 포로들을 모두 찾으면 이슬람 포로들을 석방하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돈이 먼저 지불되므로 추후의 석방을 보증할 수 있도록 프랑크인 인질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는 이슬람 측의 기록과도 동일하다. 만일 리차드왕이 원정 때문에 기다려줄 시간이 없었다면 첫번째 제안을 받아들이면 된다. 돈과 이슬람의 주요 인사 몇을 인질로 접수하면서 2천7백명의 포로들을 풀어주고 나중에 프랑크인 포로가 준비되는 데로 이슬람 인질과 교환하면 되니까 말이다. 수 천명의 포로를 뒤에 남겨 놓고 원정을 떠나는 것은 불안한 요인이 될 수 있지만, 인질 몇 명은 아크레에서 소수의 병력으로도 감독할 수 있기 때문에 전혀 부담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당시 이슬람에 잡혀 있던 프랑크인들에게는 복수의 재앙이 떨어졌을 것이며, 가뜩이나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던 예루살렘 왕국에게는 결과적으로 큰 해가 되었다.

 

시오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기록을 따르고 싶었겠지만, 이렇게 되면 리차드를 합리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살라딘의 돈 문제라고 생각된다. “정치에는 미숙아와도 같다”라고 처어칠 조차도 혹독하게 평가한 리차드왕을 그녀는 십자군 최대의 영웅으로 만들고 있다.

 

 

5. 이탈리아 함대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이야기가 있다면 바로 이탈리아 함대에 대한 칭찬이다. 피사, 제노바 그리고 베네치아 함대의 활약상은 기존 서적에서는 그렇게 자주 언급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그들이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서 활동한 만큼 십자군에 포함될 수 없었고 그런 이유로 그간 과소 평가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근데 시오노는 그들을 단번에 너무 높은 곳까지 끌어올렸다. 그들이 동 지중해의 재해권을 확보하고 있었던 점은 사실인 것 같다. 이집트는 물론 동로마 제국까지도 한동안 꼼짝하지 못했으니... 하지만 그들이 언제나 도움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끼리의 반목은 종교 기사단까지 끌어들였고, 결국 이탈리아 함대간의 전투가 벌어진 적도 있다. 그들은 지나치게 이익만을 추구한 관계로 많은 장소에서 불화를 조장하였다. 아크레가 이슬람에게 점령되었을 때는 프랑크인들 모두가 목숨을 구하고자 몰려든 항구에서조차 피난민들을 향해 뱃값을 흥정하곤 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탈리아의 상인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런 이야기들을 전혀 포함하지 않았다.

 

가장 극단적인 예는 4차 십자군 원정이다. 베네치아의 상인에 속아서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장본인들이 그들인 것으로 우리는 배워왔다. 시오노는 이들 베니스의 상인들이 약속을 꼭 지키며, 전투에서는 용감하고, 전리품 분배에서는 양보를 실천했다고 한껏 추켜세웠다. 그리고는 늙은 도제 단돌로를 또 한 명의 영웅으로 부각시킨다. 목격자 빌라르두앵의 조푸르아(Geoffrey of Villehardouin)가 쓴 글이 있으니 만큼 단돌로가 용감한 것은 사실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시오노는 그가 거의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라는 점을 밝히지 않았다. 

 

시오노는 이 4차 십자군조차 정당화하려고 한다. 베네치아의 활약으로 성지로 가는 뱃길이 안전해졌고 라틴제국이라는 우방까지 생겼다고 말이다. 그리고는 같은 기독교인을 합법적으로 공격했던 알비 십자군의 예를 들면서 “기독교인을 공격했다고 해서 십자군이 아닌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기까지에 이른다. 실제로 당시 교황이던 이노켄티우스 3세는 4차 십자군의 동로마 제국 침략 소식을 듣고는 격노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후 교황은 이 침략에 착안하여 알비 십자군을 제창하였으니, 시오노의 유일한 핑계도 사실상 베네치아 사람들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베네치아가 이끈 4차 십자군으로 인한 피해는 실로 엄청나다. 우선 십자군 왕국의 안정을 위해 싸울 수 있었던 4차 십자군을 딴 곳으로 몰고 가서 현지의 어려움을 해소하지 못했다. 또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역사상 유래가 없는 약탈로 많은 수의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민간인에 대한 잔악한 진압을 했던 알비 십자군의 기원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로마 제국을 급격히 약화시켜서 이후 오스만 투르크의 침략에 결국 영원히 멸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동로마 제국이 없어지면서 이후에 이슬람 세력이 비엔나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현 시대까지도 이어진 발칸 반도의 비극도 따지고 보면 시오노가 그렇게 칭찬해 마지않는 베네치아인들의 행위에 의해 유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6. 점잖은 영웅 프리드리히 2세


프리드리히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아버지는 독일인 하인리히6세였지만, 어머니는 이탈리아인이였고 자란 곳도 이탈리아 시칠리아였다. 그래서 그런지 시오노의 남다른 이탈리아 사랑이 이 사람한테도 적용되는 것 같다.

 

십자군으로서 프리드리히 2세의 가장 큰 업적은 싸우지 않고 예루살렘을 수복하였다는 점이다. 단지 평화 조약만으로 예루살렘을 넘겨 받았고, 그는 그곳의 왕도 겸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 일로 인하여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시오노는 프리드리히 2세를 가능한 모든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칭찬하고 그의 모든 행동을 합리화한다. 더불어서 협상 상대였던 이집트 술탄 알 카밀까지도 같이 미화되기 일수였다. 그리고는 당시 사람들이 명분에 너무 집착하여 실리를 추구하는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되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도 프리드리히의 업적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알 카밀에게서 받은 것은 단지 예루살렘과 그로 이어진 통로 뿐이었다. 그것도 성벽이 거의 없는 도시 하나만 달랑 받은 것이다. 이는 전략적으로 취약하기 그지 없는 상태이다. 방어를 위한 완충 지역도 없고 도시를 방어할 성벽도 없다. 사실상 이는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데려와서는 10년이라는 휴전 기간으로 싸울 수 없게 묶어 놓고 돌아간 것 뿐이다. 예루살렘은 잠시 가져보는 선물일 뿐이었다. 실제로 알 카밀은 휴전 기간만 끝나면 바로 빼앗아 버리겠다고 측근에게 이야기 했다고 한다. 물론 알 카밀이 한 말은 시오노의 책에 나오지 않는다. 또한 그녀는 프리드리히 2세가 키프러스에 끼친 해악에 관해서도 침묵하고 있다.

 

 

 

시오노의 이탈리아에 대한 짝사랑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이 이야기 전편에 진하게 흐르고 있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자신이 선호하는 누군가를 부각 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적인 사람을 격하시켜야 한다. 그렇게 되면 역사가 크게 뒤틀리게 되는 상황을 피할 수가 없다. 툴르즈의 레몽이 그랬고, 필립 2세와 콘라트 그리고 장 드 브리엔이 시오노에 의해 철저히 무너졌다. 더불어서 동로마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가장 좋지 않은 비유로 묘사되었다. 

 

십자군 논객 김태권은 안나 콤네나와 아랍인의 저서를 많이 인용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 안나 콤네나의 알렉시아드는 딸이 쓴 아버지의 전기라는 점에서 객관성이 의심스럽고 -십자군과 관련하여 런시만은 그녀를 인정했지만- 아랍인의 기록도 피해자의 입장에서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역시 같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김태권도 이를 잘 알고 있겠지만, 주로 인용한 이유는 아무래도 약자로서의 시각에서 보려는 자신의 의도에 부합된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참고 문헌의 취사 선택 뿐 아니라 의도적인 왜곡도 서슴치 않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이곳에 내가 한 지적들의 상세한 내용을 그녀가 모를 리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 무서울 수 밖에 없는 것이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빼고 덧붙이고 해서 자신의 취향대로 역사를 만들어도 된다는 생각을 감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객관으로 포장된 그 글들은 독자들에게 그대로의 역사적 진실이 될 수 밖에 없다.

 

김태권과는 다르게 시오노 나나미는 강자로서의 역사를 선호한다는 점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부담이다. 그녀는 제국주의의 전 단계를 취하고 있는 베네치아와 제노바에서 현대 정치 외교의 원형을 찾고 있다. 로마인 이야기에서부터 그녀는 냉혹하리만치 약한자의 슬픔이나 눈물을 개의치 않아 왔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이야기는 언제나 깊이 없는 영웅담처럼 들린다. 

 

그렇다고 김태권의 경우처럼 반드시 약자의 시각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편협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취향에 따른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하는 역사가 우리에게 필요한 바로 그것이다. 이번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는 총 세 권에 이르는 비교적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있는 그대로를 전하는 역사서가 아니라 각색된 소설로 여겨져야 한다.

Posted by Spalmi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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